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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경산 칼럼

[칼럼13] 훈민정음 창제는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관리자 | 조회 1286

 

[칼럼 13]

훈민정음 창제는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를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아무리 세종실록을 자세하게 살펴보아도 새로운 문자 창제작업의 시작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단지 세종실록 세종 2514431230일 자의 기사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는 것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종실록을 포함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정인지 서문>, 동국정운<신숙주 서문>과 신숙주의 문집 보한재집, 성삼문의 직해 동자습<서문>을 비롯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사료들을 면밀하게 살펴보아도 창제 시기와 관련된 기사를 찾을 수 없어서 더욱더 미궁을 헤매게 된다.

 

국가의 정무뿐만 아니라,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 정보, 외교와 군사 관계, 의례의 진행, 천문 관측 자료, 천재지변 기록, 법령과 전례 자료, 호구와 부세, 교역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 차자, 상소와 비답 등, 당시 조선 시대의 거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외교적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 등 내용의 풍부함과 상세한 묘사 등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인 편년체 역사서로 평가받는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위대한 문자 훈민정음 창제의 시작과 과정에 대한 기록이 단 한 줄도 없다는 것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의 불가사의한 의문으로 남는다.

 

실록편찬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권한으로 왕들을 따라다니면서 왕과 주변 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빠짐없이 적을 수 있었던 춘추관 사관들마저 눈치조차 채지 못하게 세종은 왜 새로운 문자 창제작업을 은밀하게 시작했을까?

 

아무리 이 나라 이 겨레의 운명을 짊어지게 될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일지라도 당시의 명나라에 대한 눈치 보기, 즉 사대주의가 대세였던 시대 상황에서 중국 글자와 다른 새 글자를 만들어 낸다는 일은 왕위를 걸 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작업에 대하여 드러내 놓고 공개적으로 작업하다가 만약 문자를 새롭게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사초에라도 기록되었다면 당시 지식인들의 우두머리급인 최만리를 비롯한 학자들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에 보이듯이 의기양양하고 당당하게 임금을 궁지로 몰아넣을 만큼 기세등등했던 사대 모화에 명운을 걸고 있던 기득권 세력들 때문에 새로운 문자 창제에 관한 작업은 시끄럽게 떠들 일도 아니었고 드러내 놓고 여럿이 상의할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실록에는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더 체력이 떨어지거나 병으로 앓아 드러누워 버리기 전에 완성하고자 했던 세종의 의지보다도 최만리의 예에서처럼 반대 상소로 시끄럽게 할 신하들을 의식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내기 위해 경연마저 중지하기를 거듭하고, 되도록 정사를 줄이기 위해 세자에게 처결권을 하나씩 넘기는 방안을 마련하여도 임금의 숨은 뜻을 알 길 없는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곤 할 때마다 세종은 답답한 마음을 삭이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얼마나 오래 걸릴지도 기약할 수 없는 새 글자 창제라는 것이 단기간에 딱 끝날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 비밀스러운 작업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으리라는. 보장마저 할 수 없는 긴장 속에 있었던 144331일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발표하기 8개월 전 세종은 소헌왕후를 비롯한 세자와 대군 및 제군과 대간과 육조를 거느리고 온양현 온천 가는 길에 용인현 도천에서 초저녁부터 이고(二鼓 : 북을 두 번 쳐서 시간을 알림. 9~11)까지 영인(伶人 악공과 광대) 15인으로 하여금 풍악을 울리게 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궁금증을 떨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