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보물 훈민정음(전 국회의원)
김성동 | 조회 465
나라의 보물 훈민정음
김성동(전 국회의원, 전 국회의장 비서실장)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은 “현대사의 기적을 이룬 나라”로 불립니다. 세계인들은 1950년대 지구촌 최극빈국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경제 강국으로 도약한 한국의 변모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아울러 대변혁의 원동력이 된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 주목합니다. 전문가들은 “교육을 통해 한 국가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한국”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개발연대 교육에 대한 국가적 배려는 눈물겨웠습니다. 빈한한 국가재정 형편에도 초등학교 의무교육제를 도입했습니다. 6.25 한국전쟁과 같은 국가 존망의 기로에서도 교육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교육시설이 파괴나 징발을 당했음에도 산속과 해변을 가리지 않고 ‘노천교실’, ‘천막교실’을 만들어 수업을 계속했습니다. 피난지에서 운영된 ‘전시연합대학’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병력이 아쉬운 상황임에도 전후 복구의 자원이 된다는 이유로 대학생들에게는 재학 중 병역 유예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런 선배 세대들의 선견지명을 토대로 건설된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50년대 교육개혁의 결과 대량 배출된 한글세대가 60년대 이후 산업화의 주역이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렇기에 단기간에 산업화⋅민주화⋅정보화를 모두 이룬 ‘한국의 기적’은 곧 ‘교육의 기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육혁명’의 못자리가 된 것이 바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한글’입니다.
실로 한글은 빛나는 문화유산이며 고귀한 문화자산입니다. 여러 ‘소리글자’ 중에서도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입니다. 열 자의 모음, 열넉 자의 자음, 27종의 받침을 활용해 수천 개의 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발음기관과 발음 작용을 본떠 만들어진 한글의 과학성은 정보화 시대의 진전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휴대전화의 자판을 보면 하늘을 뜻하는 ‘⋅’, 땅을 뜻하는 ‘ㅡ’, 사람을 뜻하는 ‘l’ 석자로 수십 가지의 모음을 다 적을 수 있습니다. 자음은 동일한 자판을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예삿소리(ㄱ)→거센소리(ㅋ)→된소리(ㄲ) 순으로 변환돼 결국 간단한 조작으로 모든 글자를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간결성은 다른 어떤 언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글의 탁월한 편이성을 입증해 주는 사례입니다.
세계 역사를 살펴볼 때 한글처럼 특정한 인물이 주도해 새 문자를 발명하고 국가 공용문자로 사용토록 한 경우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특히 문자를 만든 취지와 원리, 또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을 정연하게 담은 기록, 곧 『훈민정음』을 함께 출판한 것도 유례를 찾기 힘듭니다. UNESCO가 1997년 10월 이 서책을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선정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이 『훈민정음』의 서두에서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를 명확히 피력하고 있습니다. 즉 “나라의 말이 공용되는 한자와 통하지 않아 백성들이 나타내고 싶어도 제 뜻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는 실정임을 긍휼히 여겨 쉽게 익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스물여덟 자를 새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같은 세종대왕의 숭고한 애민정신이 반영되어 훈민정음은 구성원리가 간단하고 배우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가 주목하는 ‘문맹 퇴치 신화’를 이룩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한글임에도 근래 우리 사회의 한글 홀대는 도를 넘고 있습니다. 온갖 은어, 비어, 속어, 정체불명의 약어, 합성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물론 공공 방송에서조차 한글 규범 파괴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습니다. 영어 등 외국어에 대해서는 조기 교육, 해외 연수, 유학 등의 명목으로 엄청난 경비를 쏟아붓고 있는 데 비해 우리말과 우리글을 갈고 닦는데 사용되는 비용은 극히 미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분단 77년의 시간은 남북한 간의 언어를 갈수록 이질화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라 밖에서는 한류 확산의 영향으로 아시아는 물론 중남미, 유럽,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사)훈민정음기념사업회’에서 『108인의 훈민정음 글모음』을 출간하는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일입니다. 겨레의 보물인 한글과 훈민정음에 대한 국민적 자긍심을 일깨우고, 바르고 윤택한 말글살이를 북돋우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언어는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창달의 관건입니다. 이번 출판이 ‘한글 사랑’ ‘한글 존중’의 정신을 다지는 값진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