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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경산 칼럼

[칼럼 64] 언문 창제를 반대한 우두머리 최만리에 대한 오해와 진실(2)

관리자 | 조회 214

[칼럼 64] 

 

언문 창제를 반대한 우두머리 최만리에 대한 오해와 진실(2) 

 

 

최만리(崔萬理, ?1445)의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며 본관은 해주(海州)인데 생년은 명확하지 않다.

 

해주 최씨는 고려 때부터 내려온 명문이다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고려 중기에 해동공자로 불린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문헌공 최충(崔冲, 984~1068)이다.

 

최만리는 최충의 13대손으로 최만리의 어머니는 충주 지씨인데 그녀의 아버지즉 최만리의 외조는 고려 후기에 상당한 발자취를 남긴 무장인 지용수(池龍壽)그는 공민왕 때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을 수복해 1등 공신에 책봉되고 그 뒤 문하시랑 겸 서북면 상원수까지 올랐다요컨대 최만리는 오랫동안 성세를 유지한 명문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최만리의 공식적 생애는 태종 14년 되던 1414년 생원과에 급제하면서 시작되었지만 4년 뒤인 태종 18년 8월 태종이 양녕대군을 물리치고 충녕대군에게 전위함으로써 조선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그 뒤 최만리는 세종대왕이 32년 동안 재위하면서 신생국 조선을 눈부시게 발전시키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이듬해인 1419년 4월 새 국왕의 즉위를 경축하기 위하여 치러진 증광시(增廣試)라는 별시에서 최만리는 3등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하게 된다이때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가 4등으로 합격했다는 사실도 덧붙일 만하다.

 

최만리의 첫 관직은 조선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의 편찬을 맡은 종부시(宗簿寺)의 종7품 직장(直長)이었던 것으로 세종 2(1420) 윤일월의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그 뒤 최만리의 거의 모든 경력은 집현전에서 이뤄졌다그는 세종 2년 3월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정7품의 박사(博士)로 임명되어 5년 뒤인 세종 7년 정5품의 교리로 승진하고, 4년 뒤 정4품의 응교로 승진 후 10년이 흐른 세종 19년 종3품의 직제학을 거친다.

 

그리고 드디어 집현전에 보직을 받은 지 18년이 되던 세종 20(1438)에 실질적인 장관인 부제학에 오른다이유는 단 하나집현전에 뛰어난 학자들을 모은 뒤 다른 관서로 옮기지 말고 거기서 오래 근무해 학문을 연마하라는 임금의 명을 최만리는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그의 다른 경력으로는 재직하고 있는 관원을 대상으로 세종 9년 3월에 시행된 중시(重試)에서 12명 중 2등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급제했고세종 14년 되던 1432년 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인 서연(書筵)에 종3품 좌보덕으로 참여한 것이 보인다.

 

그는 세종 21년에 잠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기도 했지만이듬해인 세종 22년에 집현전 부제학으로 곧 복귀하고 그해에는 청백리로 뽑히는 영광을 누린다.

 

특이한 점은 최만리가 집현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14차례나 상소를 올렸다는 것이다그가 올린 상소 대부분은 흥천사 사리각 중수 및 경찬회를 혁파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가 6회에 달하고후에 문종으로 등극하게 되는 세자의 섭정을 보좌하는 관서인 첨사원 설치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상소가 3회였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한 상소는 14번의 많지 않은 상소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가장 민감한 사안을 건드린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